홍씨의 기원

홍씨가 처음 생긴 곳은 중국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홍씨는 그 뿌리를 달리하는 세 계통의 홍씨가 있다. 그 첫째는 공공씨를 연원으로 하는 홍씨이다. 중국 감숙성 서북부에 있는 돈황敦煌 지역에 살고 있는 공공씨共工氏(고대 치수의 관리)의 후손이 원수의 추격을 피해 공에다 자를 붙여 홍이라는 성씨를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는 개성改姓을 한 경우인데 굉씨가 홍씨로 개성한 경우와 홍씨가 홍씨로 개성改姓한 경우가 있다. 셋째로 뿌리를 알 수 없는 육계당六桂堂 홍씨가 있다.

 

시조 홍천하

지금으로부터 약 1,400년 전(639) 고구려의 영류왕이 덕예 문학의 학사學士를 보내달라는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다. 이에 당태종은 홍학사를 수장으로 한 8학사(, , , , , , , )를 파견하였다. 이중 홍학사가 남양 홍씨의 선시조先始祖 되는 홍천하洪天河이다. 그의 휘는 천하, 자는 명보明甫로 대대로 중국 강남 휘주徽州 사람이었다. 요동을 거쳐 고구려에 처음 정착한 곳이 당성군의 은수포銀樹浦(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전곡리)로 이곳에서부터 당나라의 문물과 유학을 전수하였다. 원래 당성은 당나라와의 교통의 요지이며 삼국시대 말엽에는 서로가 탐내서 싸움이 그치지 않았던 곳이다. 드디어 644년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때문에 당나라에서 파견된 학사들은 고구려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입장이 되어 당나라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란으로 육로가 차단되어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부득이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지리산 덕산촌德山村(현재 경남 산청군 덕산면)에 머물러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신라의 27대 선덕여왕은 예로써 대우하고 8학사들이 덕산촌에 편안하게 머물러 있게 돌보아 주도록 명하고 홍학사를 덕산촌주德山村主로 봉하였다. 또한 8학사를 신라의 신하가 아닌 당나라의 신하라 하여 당신唐臣이라 하였고 홍학사의 학덕을 높여 도호道號를 당동唐東선생이라 하였다. 태종무열왕 역시 지극히 봉양하여 처음 도착한 곳에 성을 쌓아 당성唐城이라 하고 그를 당성백唐城伯으로 봉하였다. 신무왕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전습하고 태자태부太子太傅(태자의 스승)를 봉하였고 효소왕은 유지를 이어받아 당성후唐城侯로 봉하였다. 신라의 5대 왕이 다 스승으로 섬겼으니 공의 덕망과 예능을 짐작할 수 있다.

 

토홍과 당홍으로 나누는 홍씨

남양 홍씨는 동성동본이나 조상을 달리하는 두 가지 계보가 있는 성씨이다.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이 그것이다. 당홍은 고구려 때 귀화해 온 홍학사의 후예이고, 토홍은 고려 고종조에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을 지낸 홍선행의 후손이다. 당홍, 토홍이라는 속칭도 바로 이같은 귀화파와 토착파의 구분에서 연유했다. 그러나 토착파인 토홍의 역사보다 귀화파인 당홍의 역사가 300여 년 이상 길다는 데서 동성동본 두 집안의 관계는 역사의 미궁에 들어가 있다. 두 집안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는 몇 가지 가설이 있다. 그 하나는 당홍은 글자 그대로 당나라에서 귀화해 온 홍씨이며, 토홍은 우리나라 토착의 홍씨라는 것이다. 둘째는 당홍은 남양의 옛 이름인 당성홍씨의 약어로서 또다른 남양 홍씨가 생겨나자, 이를 구분하기 위해 당홍에 대칭되는 용어로 토홍이란 별칭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세째는 당홍의 시조로 일컫는 홍학사의 후예 가운데 일파가 난을 피해 신분을 감추며 별계의 토호을 내세웠다는 설(당홍 측 주장) 등이다. 그러나 어느 것도 입증할 문헌이나 증거는 없다. 두 집안은 서로 계보를 따로 가리되 남이 아닌 종씨로 사이좋게 지내오고 있으며, 조상은 다르지만 동성동본이라 하여 서로 결혼도 하지 않는다. 남양 홍씨는 고려 때는 최고의 명문 갑족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329(당홍 206, 토홍 123)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전주 이씨(884), 안동 권씨(359), 파평 윤씨(336)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것이다. 그중 당홍에서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8, 문형文衡 2명을 비롯해 왕비 1(헌종의 계비), 청백리 3, 부마 4, 공신 10여 명을 배출하였다.

 

 

당홍계

중시조 홍은열

시조 홍은열은 신라 경문왕 9(869)에 홍천하의 11세손으로 출생하였다. 홍은열의 초명初名은 유, 자는 자술子術, 후에 몽량夢良이다. 는 복룡伏龍으로 당시 사람들은 복룡선생이라 불렀다 한다. 태조는 고려 창업에 크게 공헌한 그에게 은열殷悅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는 그 공덕이 '나라의 명 재상인 부열傅說과 같다'는 의미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삼한이 서로 쟁패를 겨루는 후삼국의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라 말의 석학 최치원과 풍수지리설의 대가였던 도선道詵스님 등 많은 문사文士로부터 수학하면서 수신과 제가에 힘을 다한다. 그러다 최치원이 신라가 내리는 높은 관직을 마다하고 산사로 은거하면서 당시 궁예 수하로 있던 왕건에게 보낸 격려 편지에서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곡령(개성)은 푸른 솔이다”(鷄林黃葉 鵠嶺靑松) , “신라는 망하고 개성의 새 나라는 흥할 것이다라는 내용을 전해 듣고, 새 나라 건설에 참여하기 위하여 철원 태봉국으로 가서, 궁예의 신하로 입문했다. 그리고 나중에 궁예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왕건을 세울 때 함께 참여하여 고려 개국에 진력을 다하게 된다. 그 후 고려가 936년 후삼국, 삼한을 통일한 뒤인 서기 940년에 태조 왕건은 삼한통합에 공헌한 공신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신흥사神興寺에 공신당功臣堂을 지어, 동쪽과 서쪽 벽에 고려 개국 삼한공신을 그려 넣고 공신호功臣號를 책록하였다. 이때 태조 왕건은 은열에게 18자에 걸친 가장 길고도 화려한 공신호를 내려준다. 그것은 고려 광익 효절 헌양 정난 홍제 분용 양채 보예 경제 공신”(高麗匡翼効節獻襄定難弘濟奮庸亮采保乂經濟功臣)이다. 벼슬이 정일품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자리에 올랐다. 시호諡號는 충정공忠貞公이다. 의성 홍씨의 시조 홍유(초명은 홍술弘述) 장군과는 별개의 인물이다. 홍은열의 묘는 황해북도 토산군 서천면 홍묘리 취적봉 아래 있으며 가묘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노곡2리 산 25번지 노곡재에 조성되어 있다. 후손들이 1960년에 충북 청원군 미산면 수산리에 남양사南陽祠를 건립하여 시조 홍은열과 6세손 충평공忠平公 홍관洪瓘, 11세손인 충정공忠正公 홍자번洪子藩, 광정공 홍규洪規 등 네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9월 마지막 일요일에 제례를 지내고 있다.

 

당홍의 파분류

당홍은 그의 손자대에서 1파 재신공파宰臣公派, 증손대에서 다시 1파 예사공파禮史公派, 6대손 때 1파 중랑장파中郞將派가 갈리고 13대 아래서 13파가 갈려 모두 16파로 나뉜다. 그중 후손이 가장 많은 파가 남양군파南陽君派(파조 홍주洪澍), 문정공파文正公派(파조 홍언박洪彦博),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파조 홍언수洪彦修), 익산군파益山君派(파조 홍운수洪云遂), 예사공파禮史公派(파조 홍복洪復), 중랑공파中郞公派(파조 홍후洪厚) 등이다. 남양군파와 문정공파의 후손이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다음이 익산군파(15%).